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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천교회는 1901년 3월 15일 송천 4리 하송마을 139번지에 위치한 이사윤(李士允, 1869. 5.17生)의 사랑방에서 당시 경북 서부 지방 선교를 담당한 부해리 목사에 의해 창립된 교회로, 현재 경북 김천시 아포읍 송천4리 1366-35번지(전화 054-431-4277)에 위치한 한국기독교장로회에 소속된 교회이다.
1928년 총회에서 간행된《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상)의 1901년(辛丑) 기사에서는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조선예수교장로회총회, 1928《朝鮮예수敎長老會史記》(상)(p.89)
金泉郡 松川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本里人 李載旭이 信主하고 宣敎師 傅海利와 協力傳道하야 信者 漸進하야 禮拜堂을 建築會集하니 敎會가 遂成하니라
또한 박덕일 목사와 박문영 장로에 의해 편찬된 《경북교회사(1894~1923)》에서도 송천교회는 1901년 부해리 선교사에 의해 설립된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이상의 기록을 토대로 생각해 볼 때 1901년의 송천교회 창립 년도는 의심의 여지가 없는 일이다.
1901년은 한국에서 최초의 교회가 설립된지 17년밖에 지나지 않는 시기이다. 이를 생각할 때 송천교회는 한국의 전형적인 초대 교회에 해당한다고 할 수 있다. 한국에 처음으로 기독교 복음이 전래되었을 때 당시 사회에서는 기독교를 ‘임금도 부모도 없는 종교[無君無父의 敎]’로 인식하는 경향이 강했다. 이로 인해 수구적(守舊的)인 세력들에 의해 많은 탄압과 갈등을 빚기도 하였다. 이러한 상황에서도 교회와 교인들의 수는 점점 증가되어 갔는데, 이는 당시 지식인을 비롯한 개화 의식을 지닌 지배층의 일부와 일반 민중들이 기독교 신앙을 받아들인 데 따른 것으로 생각된다. 초대 교인들이 이처럼 처음 교회에 나오게 된 동기는 무엇이었을까? 먼저 선교사들과 한국인 전도인들에 의해 전파되는 참 진리인 하나님의 말씀[福音]에 감화되어 자발적으로 교회에 나와 세례를 받는 이들이 많았다. 1887년 9월에 세워진 한국 최초의 조직 교회인 새문안 교회는 이러한 자발적인 세례 교인 14명에 의해 창립된 교회였다. 하지만 일부 민중들은 지배층의 수탈(收奪)이나 관리의 탐학(貪虐)을 피하려는 현실적인 목적에서 입교하는 이도 있었고, 일부 지배층이나 지식인의 경우 서양 종교인 기독교를 통하여 개화와 근대화를 이루려는 정치적인 목적에서 교회에 들어오는 이들도 있었다. 당시 송천교회가 위치한 곳이 전형적인 농촌지역이었던 것을 볼 때 송천교회의 초대 교인들은 자발적인 신앙심에 의해 입교한 교인들이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1901년 설립 당시의 초대 교인으로는 조사(助事) 방명원(方明圓)과 양성학교(養性學校) 교사를 지낸 김중근(金重根),이재욱(李載旭=이영화 李永化),송병학(宋秉鶴),김윤춘,송병직(宋秉稷) 등이었다. 1902년에는 조사(助事)가 김기원(金基源)으로 바뀌었고, 교인으로는 유치만,유군준,김성구,송진원,송창순,이봉화,송준수,송병철,성낙신,김상구,김병호,김덕천 등이 있었다.
당시 초대 교인들을 좀더 구체적으로 살펴 보면 다음과 같다. 교회 창립 당시의 방명원(方明圓) 조사는 청도군 청도읍 평양1리 속칭 한재마을 출신으로 부해리 선교사를 따라 송천교회를 설립한 첫 해 조사로 시무했다. 그의 부인 김명성(金明星)은 여성으로서는 경북 최초로 세례를 받은 인물로 전한다. 또한 김명성이라는 이름은 세례 받을 당시 이름이 없어 부해리 선교사가 방명원의 ‘명(明)’ 자를 따서 ‘밝은 별(Bright Star)’이라는 뜻으로 지은 것이라고 한다. 방명원 장로는 1919년 당시 달성군 내당동에 거주하였으며, 64세의 고령으로 장로로 시무하면서 최재화(崔載華, 1892~1962)를 중심으로 독립운동을 전개하던 이들에게 비밀 모임 장소를 제공하는 등 독립운동을 지원하는데 앞장섰다. 나아가 방명원 장로는 최재화를 중심으로 조직된 비밀결사 혜성단(慧星團)의 활동을 지원하면서, 4월 18일 밤 자신의 집에서 <근고 동포(謹告同胞)>라는 경고문(警告文)을 기초하게 하고, 뒤이어 27일 <경고아동포(警告我同胞)>라는 전단을 만들게 하였다. 5월 7일에도 최재화는 방명원 장로의 집에서 <경고 관공리 동포(警告官公吏同胞)>라는 격문을 만들어 곳곳의 관리들에게 발송하여 한국인 관리들의 사직을 경고하기도 하였다. 이처럼 방명원 장로는 대구 인근 지역 독립운동의 후원인(後援人)으로 큰 역할을 한 인물이다.
교회의 분립
송천교회가 창립된 후 교회의 성장이 크게 이루어져 각처로 교회를 분립하였다. 이를 통해 송천교회가 인근 지역 교회들의 모교회일 뿐 아니라, 당시 이 지역 선교 활동의 중심지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가장 먼저 분립된 덕계교회에는 이중희 성도가 이거하여 학교를 설립하고 교사로 활동하였으며, 후에 문경 지방 조사로 피선되어 시무하였다. 그후 안동읍 교회로 이거하여 3,1운동에 참여하였다가 투옥되기도 하였다. 덕계교회는 한때 교회가 폐쇄되었다가, 봉산교회로 다시 세워졌다. 이곳에는 지금도 이희봉의 자손인 이택영 원로 장로가 교회를 섬기고 있다. 한편 죽원교회(현 대원교회)도 1903년 송천교회에서 분립되었다. 그러나 현재의 대원교회에서는 1899년 3월 창립된 것으로 주장하여 지난 1999년 교회창립 100주년 기념예배를 드렸다. 대원교회는 ‘1899년 3월 9일 당시 노사진,최대익 등이 복음을 받아 노사진의 집에서 예배를 드리기 시작함으로 교회 설립의 기초가 되다’라고 기록하고 있다. 그러나 죽원교회의 창립 연도에 대해서는 이견이 있다. <경북교회사>에서는 1901년 송천교회와 같은 해 설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고, 송천교회 <교회약사>에서는 1903년 송천교회에서 분립된 것으로 보고 있다.
다음 <표>는 송천교회에서 분립된 교회들을 정리한 것이다. 앞으로도 송천교회는 지역 모교회로서의 위치를 깨닫고 더욱 성장하여 인근 지역에 더 많은 교회를 설립하여 지역 복음화에 앞장서 가야 할 것이다.
[표] 송천교회에서 분립한 교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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년도 |
교회명 |
소재지 |
현재의 상황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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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회명 |
교역자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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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 |
덕계교회 |
아포읍 봉산리 |
봉산교회 |
최무웅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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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금동교회 |
김천시 황금동 |
황금동교회 |
노영천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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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풍령교회 |
충북 영동군 추풍령면 |
추풍령 제일교회 |
이종덕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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죽원교회 |
구미시 옥성면 |
대원교회 |
이봉호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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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 |
선산읍교회 |
구미시 선산읍 |
선산읍교회 |
이현상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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습례교회 |
선산읍 습례리 |
습례교회 |
김형철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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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5 |
효감교회 |
아포읍 송천리 |
하송교회 |
김동수 목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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