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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길 가는 교회 (1)
1) 진솔한 모습
1889년 호주 장로교 선교사 데이비스가 입국하는 것을 계기로 미국 북장로회 선교사와 빅토리아(호주) 장로교 선교사는 1889년 10월 31일 "연합 공의회"를 조직한다. 그러나 한국 교회는 선교사들의 입국 이전부터 이미 자전의 방법으로 교회를 세워 가고 있었다.
처음으로 구원의 도리를 알게 된 신자들은 자원하여 사지(死地)와 같은 사회로 복음을 가지고 뛰어들었다. 이것은 그들이 스스로 체득한 전도방법이었다. 이 일에 대하여 민경배 교수는 다음과 같이 말하고 있다.
"그는 출신이 장돌뱅이였다. 걸음걸이가 빨랐고 기동성이 있었다.이 <길 가는 교회의 이미지>는 한국의 초기 교회가 심어 놓은 원형이 되었다"
<길 가는 교회의 이미지!>
이 말은 초기 한국 교회 전도인들의 희생과 헌신을 대변해 주는 말이다. 한국 교회는 애당초부터 복음의 씨를 뿌리기 위하여 [길 가는 교회], 곧 자전(自傳)하는 교회로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이제 그 구체적인 실례를 살펴보자.
2) 원산 전도
1889년 8월의 일이다.
원산의 어느 중국인이 언더우드에게 성경책을 보내달라는 전갈을 보내 왔다. 이 소식을 들은 언더우드는 소래에 있는 서경조에게 원산에 다녀올 것을 부탁한다. 이로써 한반도의 최서단 황해도 장연군에서 동쪽 끝인 원산까지 멀고도 긴 도보여행은 시작된 것이다. 이것이 [길 가는 교회]의 모습이다.
이런 도보여행 전도는 서경조만 행한 것이 아니라 한국 최초의 권서이며 전도자인 서상륜도 하였다. 그는 로스가 보내준 성경 6천권을 인천 세관을 통하여 인수한 후 이성하와 함께 서울과 의주를 왕래하며 소비하였으니 그들의 전도열은 참으로 놀라운 것이 아닐 수 없다. 이렇게 하여 [길 가는 교회]는 시작되었고, 진행이 된 것이다.
이제 당시의 상황을 서경조의 글을 통하여 직접 들어보도록 한다.
" 八月(저자 주: 1889년)에 미국셔 의학 졸업한 쳥국인이 원목사의게 편지하여 元山으로 책을 좀 보내 달라 하엿슴으로 元山에 가난 道中에셔 동행하난 한 사람의게 젼도하고 책한권에 동전 二分을 밧고 파니 그 사람이 동행하기가 두려워 압서 달아나더라. 그날 한 계책을 생각하고 촌즁에 한 기와집에 드러가셔 날이 져믈고 객점이 업슴을 빙쟈하고 하로 밤을 비려자며 밤즁에 쥬인 老人의게 젼도하고 책 십여권을 내여주니 주인 老人이 잘 듯고 책을 밧아 궤안에 깁히 녓코 쇠를 잠우난지라 웨 책상우에 놋코 보지 아니하고 감초아 두나뇨 한즉 老人이 눈을 크게 뜨고 멸문지화를 당하라고 하나뇨 하더라. 元山에 드러가니 잇때에 괴질이 대발하야 길가에 반은 뭇치고 반은 드러난 송장이 총총한대 악한 내암새는 쵹비한지라. 시가에 드러가니 집집이 문을 닷고 인젹이 됴됴한지라. 해는 지고 객뎜을 엇지 못하야 방황하니 한 부인이 가련이 녁여 방을 허락하난지라. 드려가 보니 봉창한 조희는 반이나 업어지고 습긔는 불때던 집같지 아니하고 헤여진 자리 하나 밧긔 업난지라. 할수업서 져녁밥을 어더먹고 밤을 안져새다십히하고 아침에 淸館에 가셔 그 사람을 수일 동안 찻다가 찻지 못하고 맛참 의쥬 사람 두벗을 맛나 젼도하고 책권식 주고 비감한 마암으로 눈물을 흘니고 도라오니라."
복음의 사신이 되어 성경 한 권을 전달하기 위해 황해도 서해안에서 원산 동해안까지 도보로 왕래한다는 것은 인간적 열성이나 영리적 동기로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것은 오직 하나님께 대한 충성심과 구령의 열정이 넘칠 때에만 가능한 일이다. 목적지에 조용히 다녀온 것이 아니고 도중에 만나는 사람에게 노방전도와 축호전도를 병행하였다. 참으로 대단한 사건이 아닐 수 없다.
이것이 [길 가는 교회], 곧 [자전하는 교회]의 진면모(眞面貌) 이다.
3) [사기 상]의 기록들
한국의 초창기 교회들은 특수한 몇몇 교회를 제외하고는 대부분의 교회들이 평신도들의 전도로 개척되고 설립되었다. 이런 전도의 대열에 참여한 사례 중 몇 분만 소개한다.
재령군 신환포교회의 한치순은 예수의 복음을 듣고, 믿음을 가진 후 자기 사저에서 교회를 시작하였다. 그 뿐 아니라 동군(同郡)의 상거동교회와 안악군의 덕산교회·대동교회·금산교회, 그리고 봉산군의 당포동교회·모동교회, 신천군의 강촌교회 등을 개척함으로써 평신도 전도인의 상징적 존재가 되었다.
그 외에도 곡산군 도리면 무능리교회의 경우, 상업차 서울을 왕래하던 김재정이 우연한 기회에 입수한 성경책을 보관하고 있던 중 이를 발견한 조문백이 이 성경책을 이태겸·이치겸·김해득과 더불어 몇 개월 동안 연구한 끝에 믿기로 작정하고, 서울로 올라와 언더우드를 방문하여 기독교에 대한 신앙의 도리를 좀 더 자세히 학습한 후 교회를 설립한 것이다.
이 교회는 선교사의 발길이 닿기 전에 독자적으로 설립됐을 뿐 아니라 교회의 규례를 모르는 저들은 성경에 세례를 주는 것을 보고 자신들이 돌아가면서 "성부와 성자와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주기도 하였다"고 한다.
백령도의 중화동교회의 경우도 기독교인이 아닌 김성진이 백령도로 유배되어 오면서 성경을 지참하여 왔고, 그것을 섬주민 허득에게 전달하자 그것을 탐독하는 중에 믿을 마음이 생겨 소래로 건너가 서경조를 초청하여 백령도에 교회를 세울 수 있도록 도움을 요청함으로써 설립된 것이다.
이상의 사례로 보아 황해도 지역은 평신도들의 전도와 일반 민중의 기독교 진리에 대한 열망 때문에 급속히 확산되면서 교회가 설립되고 성장하게 된 것이다
5. 길 가는 교회 (2)
4) 번져가는 불길
소래교회가 설립되자 이 소문은 삽시간에 황해도 일원에 퍼졌다. 개화에 눈을 돌리기 시작한 선각적 인물들과 수 백년 중앙정치 무대에서 소외된 한( 恨)을 가지고 있던 해서의 유지들은 자진하여 기독교의 복음을 받아들여 교회를 설립하는 일에 앞장서게 된다.
이런 당시의 정황으로 보아 해서 지역에는 서울의 새문안교회 (1887년 9월 12일에 설립)보다 앞서 설립된 교회들이 허다했음을 알 수 있다. 그러나 [사기 상]에는 이런 사실을 정확히 기록하지 못하고 있어 오히려 선교사 공의회의 조직과 [네비우스 정책] 수립을 연계하여 교회설립을 기록한 느낌을 가지게 한다.
초창기 해서지역의 교회들은 선교사의 도움없이 자체적인 전도와 성경연구에서 이루어진 것이어서 선교사 공의회의 조직이나 [네비우스 정책] 수립을 기다릴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선 이 사실부터 밝히고 다음으로 소래교회의 영향을 입은 여러 교회의 설립과정을 진술하려고 한다.
[사기 상]에 있는 재령읍교회에 대한 기록을 살피면 다음과 같다 .
"一千八百九十一年 載寧邑에셔 敎人 禮拜時에 羅馬敎徒가 驟至하야 男女 敎人을 該敎堂에 捉致하야 威脅恐喝하대 大聖敎를 不奉하고 烈敎를 誤信함은 不可라하야 苔刑하고 放送하니라"
이 기록으로 보아 재령읍교회는 1891년 이전에 설립된 것이 분명하나 [사기 상]에는 재령읍교회의 설립이 1895년도에 된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착각을 일으키게 한다. 그러나 재령읍교회는 1895년에 설립된 것이 아니라 그 이전에 설립되었고, 교회가 부흥되어 자리를 잡아가는 해가 1895년이라고 보는 것이 마땅할 것이다.
[사기 상]의 기록을 소개한다 .
" 載寧邑敎會가 成立하다. 先是에 傳道人 金伯榮의 勤勉으로 信者 八十餘名이 竝興함에 宋氏 正信이 瓦家 八間을 寄附하야 禮拜堂으로 使用하더니"
이와 같이 [사기 상]의 연대기록은 어딘가 모르게 허술한 점이 있다. 소래교회에 대한 기록도 그런 면을 볼 수 있다.
" 長淵郡 松川敎會에셔 徐景祚를 長老로 長立하야 堂會를 組織하니 是乃 我國 敎會의 最先 長老러라 同時에 敎人이 協力 捐金하야 瓦制 八間 禮拜堂을 新築하얏다가 翌年에 敎人이 增多함으로 瓦制 八間을 增築하니라."
이상의 기록은 소래교회의 예배당 건축연대를 밝히는 기록이지만 1900년 난(欄)에 있다. 그러나 소래교회가 기와집으로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1900년이 아니라 1895년이다. 따라서 [사기 상]의 연대기록에는 큰 착오가 있음을 감안해야 한다.
사기 편찬위원인 차재명씨가 시무하였던 새문안교회의 설립에 대한 기록도 [사기 상]에는 잘못되어 있다.
" 京城 西大門에 敎會가 最先 設立하다. 先是에 信者 十餘人이 宣敎師 元杜尤 私邸(貞洞)에 會集 禮拜하더니 至是에 宣敎師 補助로 京城 西大門에 基地를 買收하고 敎友들이 捐補하야 瓦家 二十餘間을 新築하고 新門內 第一 禮拜堂이라 命名하니 當時 敎役者난 徐相崙 徐景祚이러라."
[사기 상]의 기록이 어떠하든지 새문안교회의 설립은 1887년 9월 12일이며, 기와집 예배당을 건축한 것은 1895년의 일이다. 이런 사실을 감안할 때 [사기 상]의 연대기록은 참고자료는 되나 정확한 연대를 측정하는 데는 매우 부적합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황해도지역의 교회는 아니나 경기도 고양군 소재의 행주교회도 역시 교회설립에 대한 기록이 [사기 상]과 다른 부분이 있다. 행주교회 당회록에는 설립연도를 1890년으로 기록하고 있으나 [사기 상]에는 1897년에 설립된 것으로 기재하고 있다.
이상의 여러 증거로 보아 황해도 지역에는 1893년 이전에도 교회들이 설립되었음을 짐작하게 된다. 더우기 [사기 상]의 기록에 의하면 1893년 한 해 동안에 안악군에는 교동교회를 비롯하여 덕산교회·안악읍교회·무석교회·삼상교회 등 5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재령군에는 신환포교회·상거동교회·강촌교회 등 3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장연군에는 칠곡교회·장연읍교회 등 2개 교회가 설립되었고, 봉산군에는 당포교회, 신천군의 사평동교회, 송화군의 덕안교회 등이 각각 설립된 것으로 되어 있다. 한 해 동안에 6개 군에 걸쳐 무려 14개 교회가 일제히 설립되었다는 결론인데 가능성은 배제할 수 없으나 합리적으로 소화하기에는 아무래도 무리가 따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기 상]에 기재된 "선교사 공의회 시대의 황해도 교회 형편(1893-1900) " 난에 "主后 一千八百九十三年 (癸巳) 是時 各處에 信徒가 雖多하니"라고 하여, 선교사 공의회 시대가 개막되는 1893년부터 교회가 설립되고 교회가 갑자기 부흥되어 교인들이 교회로 밀려든 것 같은 인상을 짙게 풍기고 있는 것은 공의회 조직과 교회 설립을 시기적으로 맞추려는 인위적인 시도가 있는 것 같은 느낌이 든다.
그러나 한국의 교회는 공의회의 조직이나 네비우스 정책을 기다리지 않고 각처에서 한국인 평신도들의 복음전도에 의하여 자생적으로 설립되었다고 결론을 지어야 한다.
5) 황해노회 100회사의 기록
이제 황해노회 100회사에 기재된 연대를 기준하여 설립 역사를 더듬어 보면 소래교회에서 시작한 복음의 불길이 번져가는 과정을 좀 더 정확하게 추적해 낼 수 있을 것 같다.
1883년 5월 16일에 소래교회가 설립된 것을 시발로 하여 1883년 10월 20일에는 안악군 서하면 상촌리에서 장석훈·장석규·장석구 3형제와 그의 4촌 형제 장석두·장석영·장석우 등이 합심하여 대동교회를 설립하니, 황해도 지역의 두 번째 교회가 된다.
1884년에는 장연군 낙도면 산천리의 낙도교회와 재령읍 동부교회가 설립되었으며, 안악군에서는 3월 1일에 용문면 상무리 무동교회가 설립되었고, 3월 5일에는 은홍면 덕산리에 덕산교회, 10월 5일에는 대원면 당전리 당곡교회가 각각 설립되어 안악군에는 3개의 교회가 같은 해에 설립된다. 또, 같은 해 12월 24일에는 은율군 은율읍교회가 남천리에 설립되었다.
1885년에 접어들면서 2월 15일에 은율군 장련면 관해리에 관해교회, 4월 1일에는 재령군 청천면 단내리에 단내교회, 11월에는 신천군 노월면 정례리 성미교회가 설립되었다.
이 때까지 황해도 일원의 교회는 농촌지역에 주로 설립되고 있었다. 그러나 1886년부터 양상을 약간 달리하여 중·소도시에 교회가 들어가기 시작하는데, 그 문을 연 것이 동년 3월 1일 설립된 안악읍교회이다. 이 교회는 안악 경찰서 뒤 송영기씨 기와집에서 시작되었으며, 이 교회를 귓담뒤교회라고 하였다. 최초 신자는 김창국·임택권·이윤철·김용제·차승용 등이다.
경찰서는 안악읍의 중심지에 위치하였고, 그 뒤에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것은 도심 깊은 곳에 복음이 뚫고 들어갔다는 뜻이며 동년 9월 15일에는 안악읍 평정리에 무석교회가 설립된다.
1887년 3월 1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가양리 교동교회, 5월3일에는 장연군 순택면 율산리에 율산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1889년 2월 10일에는 은율군 남부면 계림리 계림교회, 3월 3일에는 안악군 대원면 지능리 지능교회와 부사교회, 안곡면 동파리 동촌교회, 문산면 상신교회, 대행면 용산교회, 안곡면 학준교회가 각각 설립되었다.
이상으로 보아 황해도 지역에는 1890년 이전, 아직 선교사들의 발길이 닿지 않았을 때 이미 교회들이 우후죽순격으로 설립된 것을 볼 수 있다. 특히 신문화 보급과 한말 계급운동의 중심지였던 안악군에는 14개 교회가 설립됨으로써 이 시대에 설립된 26개 교회의 과반수를 차지하고 있는 것이 특기할 만한 일이다.
후에 대한 예수교 장로회 총회장을 역임한 목사 중에는 안악군 출신이 특별히 많은 것도 우연한 일이 아니라고 본다.
5. 길 가는 교회 (3)
6) 기타의 기록
교회사와 관계가 없는 일반적인 기록에서도 황해도지역에는 1890 년 이전에 이미 교회가 설립되었다는 기록들을 볼 수 있다.
첫째, 안악군지에서는 안악지방에 교회가 설립된 것은 1889년부터라고 한다.
"1883년 소래에서 시작된 복음이 1889년에는 안악 지방에까지 전파되어 대원면 지능리에 지능교회, 서화면에 대동교회가 각각 설립되어 안악지방 최초의 교회가 되었고 가양리의 다리골교회(교동교회) 안악읍의 귓담뒤교회(안악읍교회) 사현의 무석교회 등이 그 뒤를 이어 설립되었다."
둘째, 안악군 서화면의 대동교회에 대한 다음과 같은 기록도 찾아 볼 수 있다.
"저희 조부 삼 형제분인 장석훈·장석규·장석구씨 등과 증조부 형제분 장석두·장석영·장석우씨 등 합하여 여덟 분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혜로 복음을 일찍이 받아드려 저희 향리에 대동교회를 세우신 해가 1889년이었습니다. "
이 외에도 자신들의 출신 교회가 1890년 이전에 설립되었음을 증언하는 증인들이 많이 있다.
1985년 11월에 황해도 출신 목사 장로들에게 고향 교회에 대한 문의 서신을 발송한 바가 있다. 이 때 낙원교회 출신 최완식목사는 다음과 같은 서신을 보내 왔다.
"황해도 장연군 낙도면 삼천리에 소재한 낙원교회는 1884년에 설립되어 역대 장로 김익건·윤창인·안치순·염창언·김시경·한장표·강경선·최창문·등이 시무하였습니다. "
이 교회는 [사기 상]에는 이름조차 올라 있지 않은 교회이다 .
이상으로 보아 사가들이 가지지 못한 사료(史料)를 보면 1890년 이전에 이미 많은 교회들이 황해도지역에 설립되었고, 새문안교회보다 설립역사가 앞서 있는 교회들이 허다하였음을 알 수 있다.
7) 선교사들의 여러 기록들
지금까지 우리는 [네비우스 정책] 이전에 목숨을 걸고 현장에 뛰어들어 전도한 한국인 전도인들에 대하여 고찰하였다. 이제 이들의 노고를 높이 평가해 주는 선교사들의 기록을 통하여 다시 확인해 보도록 한다.
우선 게일(J. S. Gale)은 그의 저서 [전환기의 조선](Korea in Transition)에서 다음과 같은 보고문을 소개하고 있다. 먼저 무어(J. Z. Moore)의 보고문을 본다.
"이 곳의 학습 지도자는 부유한 농부였는데, 그는 실제로 교회 일을 무보수로 봉사하기 위해 그의 농장 일을 조정하였다. 그 결과 교인의 수가 50%나 늘어났다.......(중략)......당신께서는 처음 어디에서 복음을 들었습니까 ? 교회인가요? 거리인가요? 기도회인가요? 아니면 성서를 통해서인가요? ] [아니오. 저는 김씨, 박씨, 또는 최씨에게서 복음을 들었습니다."
게일은 무어의 보고문에서 보수도 없이 헌신하는 평신도들의 활동을 통하여 교회가 설립되고 부흥되는 갸륵한 장면을 소개하고 있다.
다시 선천의 샤록스 (Alfred M. Sharrocks)박사의 보고서를 통하여 "조선의 교회가 이러한 이상을 실현시킬 수 있었던 방법"을 소개한다.
"지난 해 선천교회에는 6,507명의 신자가 있었다. 금년에는 신자가 11,943명으로 증가하였다. 1년 동안에 무려 5,436명의 신자가 증가했으니까 매달 평균 453명이 입교한 셈이다. 우리 소규모 집단인 선교사들의 덕택에 이러한 결과가 나타났을까? 1년간에 지역복음을 위한 선교자금으로 고작 72불을 사용한 결과일까? (중략) 이 교회들은 각 지역에 퍼져 있으며, 특별히 선발된 무보수의 남자들이 각 교회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샤록스는 선교사와 선교비의 무력함과 한국인 평신도들의 희생과 헌신을 대조하여 교회 부흥의 요인들을 설명하고 있다.
한국 교회의 외형적 성장사를 연구한 로이 쉬이러 (Roy E. Sheare)는 "1895년부터 세례 교인 수가 폭발적으로 증가되었다"고 단언하면서 "교회는 선교사들보다 앞장서" 선교를 하였다는 말을 남기고 있다.
한국 교회 성장을 연구한 서용원은 그의 대표적인 저서 [한국 교회 성장사]에서 네비우스 정책을 절대시하는 장로교인들에게 다음과 같은 말로 답하고 있다.
"우리는 네비우스 방법을 사용하였다고 하는 주장으로 한국에서 이루어진 놀라운 교회의 성장을 설명하려는 전형적인 장로교인들의 답변은 올바른 해답이라고 생각되지 않는다. 네비우스 방법을 충실하게 따르지 않은 감리교 선교부에 대하여 연구하는 동안에 점점 더 명확해진 것은 어떤 한 가지의 해답만을 정확한 것이라고 간주하는 것은 위험한 생각이라는 점이다."
선교사들조차 한국 교회의 불가사의한 발전을 네비우스 정책에 있다고 단언하지 못하고 다만 "스스로가 獨自的으로 敎會를 운영하고 있다는 놀랄 만한 結果때문이다."라고 논평하는 것이다.
이제 우리는 [네비우스] 정책을 새로운 시각과 차원에서 이해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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