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6년 그의 풍경화가 살롱에서 입선되어 C. 피사로와 교제하게 되었고, 1880년에는 인상파 화가들과 어울려 작품전을 열기도 하였다. 직업 화가가 될 것을 결심한 그는 1883년 이후 증권거래소를 그만두고, 그림에 전념하였다. 인상파 계열의 섬세한 필촉(筆觸)이 색채를 누비는 듯한 스타일이었던 그의 화풍이 갑작스런 변화를 가져온 것은, 마르티니크섬에서의 생활과 J.F. 밀레·A. 베나르 등과의 교제로 인한 것이라 여겨진다. 남프랑스의 아를에 있던 V. 고흐의 초대를 받아 그곳에서 공동생활을 시작했으나, 고흐의 정신병 발작으로 헤어졌다.
1886년 브르타뉴의 퐁타방에 체류하면서 색채연구에 전념했고, 이듬해 4월에는 대서양의 마르티니크 섬에 건너가 잠시 머무른 뒤 12월까지 다시 퐁타방에 체류했다. 마르티니크 여행에서 열대 지방의 찬란한 색채와 관능적인 기쁨을 발견하고, '자연 그대로의' 삶을 살아가고 있는 원시 공동체의 매력을 경험했다. 1888년 10~12월 남프랑스의 아를르에서 고흐와 공동 생활을 시작했지만 두 사람의 성격 차이로 인한 잦은 충돌과 고흐의 정신병 발작 현상 때문에 결국 고흐와 헤어져 파리로 돌아왔다. 1891년 마침내 남태평양의 타히티 섬으로 떠나, 형태의 윤곽선을 단순화하고 넓은 화폭에 강렬한 색채를 거침없이 구사하며 토착민들의 순수함과 솔직함을 화폭에 담아냈다.
브르타뉴에 돌아와 《천사와 격투하는 야곱(1888)》 《황색(黃色)의 그리스도(1889)》 등을 그린 후, 91년 남태평양의 타히티섬으로 떠났다. 타히티섬의 순수하고도 격렬한 <살아있는 색채>는 그를 완전히 매혹시켰고, 동시에 그의 화면을 장식적(裝飾的) 색면(色面) 구성으로 독특한 면을 띠게 하였다. 《마호리의 집》 《목욕하는 타히티의 여인(1891)》 《언제 시집가나》 《부채를 가진 여인(1892)》 《타히티의 여인들(1891~93)》 《다만 홀로(1893)》 《자바 처녀 안나(1893)》 《노아 노아(1897)》 등을 그렸다. 1901년 마르케사스제도의 하바오아섬으로 옮겼을 무렵에는 매독과 영양실조로 회복할 기력이 없었고, 1903년 《눈 속의 브르타뉴 풍경》을 끝으로 생애를 마쳤다. 후기 작품에는 《이제 싫어》 《우리는 어디서 왔으며, 무엇이며, 어디로 가나(1897~98)》 《붉은 꽃을 가진 가슴(1899)》 《해변의 기수(1902)》 등이 있다. 타히티의 풍물에서 취재한 강렬하고 장식적인 화풍은 그 뒤의 회화에 큰 영향을 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