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의 종교개혁자로 그는 종교개혁 초기에 가장 뛰어난 논쟁자였다. 오이코노무스(Oeconomus)라고 불리우기도 한다. 샤프하우젠에 있는 로마 가톨릭 프란체스코 수도회에 가입하고, 파리에서 여러 해 동안 공부한 뒤 '성서박사'라는 칭호를 얻었다(1519).
1520년 강사로 취리히에 파견되었고, 그해말에는 콘스탄츠에 파견되었다. 스위스의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자 울리히 츠빙글리의 영향을 받아 루체른에서 공식적으로 종교개혁 교리를 설교한 뒤(1522) 그 도시에서 추방당했다. 샤프하우젠으로 돌아와 그 도시의 주요종교개혁자가 되었지만 다시 추방당했고(1525), 결국 취리히에 정착했다.
제1차 취리히 논쟁(1523.1. 29), 제2차 취리히 논쟁(1523.10. 26~28, 이 논쟁 초기에 사회를 맡음), 베른 논쟁(1528.1) 등 종교개혁 초기 단계에서 벌어진 논쟁에서 적극적인 역할을 했다. 취리히에서 열린 재세례파(성인세례를 주장한 급진적인 종교개혁파) 회의에 참석했고, 베른에서 재세례파 지도자 한스 피스터마이어가 재세례파 신앙을 철회하는 것을 감독했다(1531.4.19). 그는 유아 세례를 허용하는 것에 반대했다. 그는 루터와 편지를 주고받았으며, 자서전을 포함한 여러 권의 부수적인 책을 썼다.